물질주의가 현시하는 삶의 무목적성에서 깨어난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악이 선(善)을 휘두르는 세상이며, 많은 이들이 선을 알지 못해 악으로 향하는 세상이다.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선악에 대한 관념은 깨어난 이들에게 명료하게 인식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자들은 선악식별을 명확히하기 어려운 자들이 악을 선이라 착각하고 또 악에 휘둘리는 비참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광경으로부터 선을 지키려는 문제 의식이 태동하며 나아가 사회에 대한 만연한 악을 걷어내고자 하는 고독한 길을 향한 의지를 불피우게 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파악하게 되며 널리 선을 구현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이 깃들게 된다.

 

선을 통해 깃든 소명의식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훌륭한 지침이자 기준이 된다. 또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구가하는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삶을 더욱 명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소명의식이 깃든 사람이 제시하는 삶의 방향과 가치는 많은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감화된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뜻을 함께하고자 하며 이러한 형태가 권력으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형태로 잉태된 권력은 선의지를 향한다.

 

선을 인식하고 소명의식이 깃든 자는 공동체를 향한 삶에 뜻을 두고 살아간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선의 무게는 삶을 짓누르며 삶에는 발랄한 생기보다는 엄숙함이 들어서게 된다. 속담대로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왕관을 써야되는 자 그 무게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선이 내리는 ‘명령’의 인식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의 형태로 나타나 한 인간의 의식에서 삶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의 ‘명령’은 인간이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본성에 내재된 선을 인식하고 개화하는 자들은 소수에 해당한다. 이러한 소수들은 때때로 자신과 세상과 자연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이며 자연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 인간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며, ‘신’이란 또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선을 인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강한 지적 호기심에서도 시작되지만 삶의 위기로부터도 시작된다. 큰 성취 뒤에 느껴지는 허무감과 삶의 방향에 대한 강한 회의와 의문은 인간의 삶에 실존의 위협을 주며 이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은 인류의 수 많은 철학자 또는 성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끌어안았던 문제다. 인류의 4대 성인이라 불리는 부처,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의 공통점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는 점이며 그들의 육체는 죽었으나 그들의 위대한 정신은 죽지 않고 현대까지도 살아남아 계승되고 있다.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먼 훗날에 도래할 인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처는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에 무아(無我)라고 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에 대해 '나’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그 어떠한 속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확장하여 부처는 삼라만상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다. 세상 만물은 상호의존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부처는 세상 만물이 비어있다, 공(空)하다고 표현했고 인류가 이를 깨닫기를 바랐다. 이러한 ‘자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면 ‘나’라는 존재에서 이기심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이타심이 피어오를 것이기 때문이며, 또 이 이타심은 세상을 향한 선으로 작용하여 궁극적으로 모두가 하나 된 마음인 화엄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에 사랑이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인류를 널리 사랑하는 박애정신을 의미한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내 안에 깃든 성령을 인식하고 이 성령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형제 자매에게는 모두 성령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또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된다고 말한다. 기독교 삼위일체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다. 즉 형제 자매에게 깃든 성령은 성부안에서 하나되는 것이다. ‘하나’ 되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너’라고 부르는 타인은 ‘나’인 것이다. 이를 진정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나’의 또 다른 모습인 ‘너’를 위해 용서하고 배려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을 모두가 인식하고 서로가 하나의 존재임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이다. 이 천국이 곧 모든 악을 걷어내고 모두가 선을 구가하는 세계가 된다.

 

공자는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에 인(仁)이라 했다. 여기서 인(仁)이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仁)이다. 인의예지란 ‘인’을 깨닫게 되면 ‘의(옳음)’가 무엇인지 알게되고 ‘의(옳음)’를 알면 ‘예’를 행하게 되며 ‘예’를 행하는 삶의 태도가 ‘지(지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의예지 구조에는 순서가 있다. 인(仁)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仁)이란 무엇일까? 인(仁)이라는 문자의 형상을 보면 두 사람이다. 이는 곧 ‘우리’를 의미하며 ‘우리’는 ‘나’와 ‘너’가 하나되기 위한 사랑안에서 가능해진다. 유교에 따르면 인(仁)은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이다. 이 본성을 인식하면 타인에 대한 사랑이 피어오르며 공동체를 향한 삶을 지향하게 된다. 인(仁)을 인식하는 것은 천명(天命)을 ‘듣게’되는 것이자 선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것과 같다. 천명(天命)을 들은자 선을 펼치는 삶에 뜻을 두고 살게 된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와 베다에서 존재 근원에 대한 핵심 가르침은 범아일여(梵我一如)다. 범아일여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모든 존재는 하나와 같다는 것이며, 힌두교식 표현으로는 아트만과 브라만이 하나라는 것이다. 아트만이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자 본성이다. 기독교의 성령이자 유교의 인(仁)과 같다. 브라만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같은 맥락으로 아트만은 브라만과 같다. 우리 모두는 아트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리의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힌두교를 통한 구원은 ‘나’라는 존재에 내재한 아트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내 안의 아트만(성령)을 인식하게 되면 모든 존재가 브라만(성부)과 하나됨을 알게 된다. 아트만을 인식하는 순간은 육신을 나라고 알고 있는 에고가 죽는 순간이며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이후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자연스레 사랑이 피어오르게 되고 타인을 향한 선의와 이타심이 피어오르게 된다.

 

위대한 성인과 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선을 인식하는 자, 결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선이 인간의 정신과 의식에 기거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은 인간의 가치판단에 있어 가장 우선순위가 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선은 인간에게 어떠한 ‘의무’를 부과한다. 여기서 ‘의무’란 인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실현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그 것은 세상을 향한 박애정신이자 공동체를 향한 삶이고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실현하는 과정이 인간의 삶이다. 선을 추구하며 악을 걷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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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이란?

연기론이란 싯다르타가 설파하고자 했던 핵심 수행법이자 가르침이다. 먼저 연기론에서의 연기란 한 마디로 상호의존성이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으므로 상호의존한다는 의미한다. 즉 세상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 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는 둘이 아닌 하나이다 라고도 표현하며, 인식자가 있기에 인식대상이 있고 인식대상이 있기에 인식자가 있다고도 표현한다. 결국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말한다. 사물들은 결코 본래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해 생겨났다. 이를 연기된 존재라고 말하며 실재가 아닌 환영과 같은 존재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한 내용이 연기론이다.

 

깨달음이란?

깨달음이란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즉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를 깨닫게 되면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게 된다. 또 깨달음이란 스스로 주인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숭배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숭배하게 되면 깨달음을 향한 수행은 어려워진다. 숭배는 필연적으로 숭배 대상의 존재 하중을 느끼게 되며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고 또 굴종을 낳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수행 방법

깨달음 즉, 반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크게 두 가지 수행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연기법을 통한 수행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선불교에서 행하는 명상과 같은 심법이 있다. 첫 번째로 연기법은 개체의 생멸 과정을 보는 사유 방식이다. 이러한 생멸 과정을 통해 모든 존재가 무아(無我)임을 깨닫는 것이 연기론 수행의 목표다. 여기서 무아란 존재 없음, 내가 없음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아란 정확히는 모든 존재에는 그 존재라고 불릴만한 성질,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에 나일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즉 연기법이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존재성이 없음을 보는 사유 방식이다.

 

가령 자동차를 볼 때 그 자동차는 자동차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없다. 바퀴가 없다면 자동차라 할 수 있는가? 페달이 없다면 자동차라 할 수 있는가? 엔진이 없다면 자동차라할 수 있는가? 자동차란 바퀴, 페달, 엔진 등의 여러 수 많은 요소들이 의존적으로 모여 자동차로 불리우지 자동차는 본디 자동차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론적 사유 방식을 통해 거듭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세상의 공(空)성을, 즉 모든 존재가 무아임을 깨달을 수 있다. 반야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반야 지혜 얻어야만 색 그대로 공, 공 그대로 색을 깨닫고 번뇌 그대로 보리 보리 그대로 번뇌임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존재가 어떻게 생겨나고 소멸되는지 전면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 알의 모래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진법계(一眞法界)를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의 생멸을 관하게 되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생겼다 사라지는 환영과 같음을 알게 된다. 싯다르타는 이러한 연기법적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연기법적 사유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작하면서도 이성적인 사고의 틀을 넘어서게 한다.

 

두 번째로 선 불교의 수행 방식인 심법이 있다. 심법을 통한 목표는 모든 존재가 진아(眞我)임을 깨닫는 것이다. 진아란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사실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연기법을 통해 깨닫는 무아와, 심법을 통해 깨닫는 진아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심법은 연기법과 달리 문자를 통하지 않고 진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단 번에 깨닫는 방식으로 위빠사나나 사마띠와 같은 명상을 통해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심법의 배경에는 불교 교리인 불립문자가 있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여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불립문자는 충분한 문자 공부가 선행됨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고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면 평생 고생만 하게 된다. 또한 충분한 문자 공부가 선행되지 않으면 깨달음 이후 삶에서의 지적 활동이 단절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선 수행을 통한 심법만으로 깨달으려 노력했지만 포기했다. 선 수행을 통한 선정 상태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현재의 의식으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오온이 취착했기에 수행 상태와의 괴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기법과 심법

연기법은 주로 현상적 존재에 맞춘 가르침을 펼칠 때 설하는 방식이며 심법은 주로 현상적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을 펼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현상적 존재들 상호 간의 상즉상입으로 보는 방식이 연기법이라면 현상적 존재의 근원을 밝혀서, 현상적 존재는 근원이 형상화된 것이라 보는 방식이 심법이다. 쉽게 말해 연기법은 생각하는 방법으로, 심법은 생각을 배재한 직관으로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다.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관하면 연기법을 깨치게 되고,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관하면 마음을 깨치게 된다. 연기법은 주로 사유형 인간에게 적합하며 심법은 직관형 인간에게 적합하다. 사람마다 성향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면 된다. 심법을 통해 진아를 깨닫는 것은 연기법을 통해 무아를 깨달아야만 보다 선명해진다. 즉 중요한 것은 두 방법 모두 함께해야 효과적이란 것이다. 연기법을 통해 존재가 무아임을 알고 이해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심법을 통해 이해수준에서 증득수준으로 넘어가야 한다.

 

Reference

[1] 『이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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