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론이란?

연기론이란 싯다르타가 설파하고자 했던 핵심 수행법이자 가르침이다. 먼저 연기론에서의 연기란 한 마디로 상호의존성이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으므로 상호의존한다는 의미한다. 즉 세상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 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는 둘이 아닌 하나이다 라고도 표현하며, 인식자가 있기에 인식대상이 있고 인식대상이 있기에 인식자가 있다고도 표현한다. 결국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말한다. 사물들은 결코 본래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해 생겨났다. 이를 연기된 존재라고 말하며 실재가 아닌 환영과 같은 존재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한 내용이 연기론이다.

 

깨달음이란?

깨달음이란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즉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를 깨닫게 되면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게 된다. 또 깨달음이란 스스로 주인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숭배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 숭배하게 되면 깨달음을 향한 수행은 어려워진다. 숭배는 필연적으로 숭배 대상의 존재 하중을 느끼게 되며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고 또 굴종을 낳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두 가지 수행 방법

깨달음 즉, 반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크게 두 가지 수행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연기법을 통한 수행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선불교에서 행하는 명상과 같은 심법이 있다. 첫 번째로 연기법은 개체의 생멸 과정을 보는 사유 방식이다. 이러한 생멸 과정을 통해 모든 존재가 무아(無我)임을 깨닫는 것이 연기론 수행의 목표다. 여기서 무아란 존재 없음, 내가 없음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아란 정확히는 모든 존재에는 그 존재라고 불릴만한 성질,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에 나일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즉 연기법이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존재성이 없음을 보는 사유 방식이다.

 

가령 자동차를 볼 때 그 자동차는 자동차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없다. 바퀴가 없다면 자동차라 할 수 있는가? 페달이 없다면 자동차라 할 수 있는가? 엔진이 없다면 자동차라할 수 있는가? 자동차란 바퀴, 페달, 엔진 등의 여러 수 많은 요소들이 의존적으로 모여 자동차로 불리우지 자동차는 본디 자동차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론적 사유 방식을 통해 거듭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세상의 공(空)성을, 즉 모든 존재가 무아임을 깨달을 수 있다. 반야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반야 지혜 얻어야만 색 그대로 공, 공 그대로 색을 깨닫고 번뇌 그대로 보리 보리 그대로 번뇌임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존재가 어떻게 생겨나고 소멸되는지 전면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 알의 모래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진법계(一眞法界)를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의 생멸을 관하게 되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생겼다 사라지는 환영과 같음을 알게 된다. 싯다르타는 이러한 연기법적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연기법적 사유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작하면서도 이성적인 사고의 틀을 넘어서게 한다.

 

두 번째로 선 불교의 수행 방식인 심법이 있다. 심법을 통한 목표는 모든 존재가 진아(眞我)임을 깨닫는 것이다. 진아란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사실 궁극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연기법을 통해 깨닫는 무아와, 심법을 통해 깨닫는 진아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심법은 연기법과 달리 문자를 통하지 않고 진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단 번에 깨닫는 방식으로 위빠사나나 사마띠와 같은 명상을 통해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심법의 배경에는 불교 교리인 불립문자가 있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여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불립문자는 충분한 문자 공부가 선행됨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고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면 평생 고생만 하게 된다. 또한 충분한 문자 공부가 선행되지 않으면 깨달음 이후 삶에서의 지적 활동이 단절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선 수행을 통한 심법만으로 깨달으려 노력했지만 포기했다. 선 수행을 통한 선정 상태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현재의 의식으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오온이 취착했기에 수행 상태와의 괴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기법과 심법

연기법은 주로 현상적 존재에 맞춘 가르침을 펼칠 때 설하는 방식이며 심법은 주로 현상적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을 펼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현상적 존재들 상호 간의 상즉상입으로 보는 방식이 연기법이라면 현상적 존재의 근원을 밝혀서, 현상적 존재는 근원이 형상화된 것이라 보는 방식이 심법이다. 쉽게 말해 연기법은 생각하는 방법으로, 심법은 생각을 배재한 직관으로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다.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관하면 연기법을 깨치게 되고,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관하면 마음을 깨치게 된다. 연기법은 주로 사유형 인간에게 적합하며 심법은 직관형 인간에게 적합하다. 사람마다 성향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면 된다. 심법을 통해 진아를 깨닫는 것은 연기법을 통해 무아를 깨달아야만 보다 선명해진다. 즉 중요한 것은 두 방법 모두 함께해야 효과적이란 것이다. 연기법을 통해 존재가 무아임을 알고 이해수준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심법을 통해 이해수준에서 증득수준으로 넘어가야 한다.

 

Reference

[1] 『이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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